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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를 말하다
부마를 말하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던 항쟁 당시 시민들의 기억을 담았습니다.
부마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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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이종철
이종철님 (쌀가게 점원)
구술자의 아버지는 마산 산호시장에서 쌀가게를 운영했는데 구술자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를 도왔다. 부마항쟁에 휩쓸렸을 당시에도 쌀 배달을 갔다 오는 길이었다. 평소에도 독재 정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차에 시위가 벌어지니, 자연스럽게 시위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산호시장 바로 앞 산호파출소에서 시위를 하던 도중 경찰에 강제 연행 되었다. 호송차에서부터 시작된 구타는 마산경찰서에 도착해서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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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정광준
정광준님 (삼성 라디에이터 직원)
구술자는 1979년 부마민주항쟁 당시 마산에서 사제총기 제작자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경찰의 강압적인 조사와 구타를 받았던 경험이 있다. 그는 애초 친구 김종철의 학생운동 방조자 내지 동조자로 조사를 받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경찰이 조작한 사제총기 제작 혐의를 받았고, 현재까지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가슴 속에 묻어두었다. 이제서라도 그 진실을 밝힐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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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이혜만
이혜만님 (동아일보 기자)
구술자는 1969년 경북대 4학년 재학 중 3선개헌 반대 시위 주도로 일본 유학 좌절. 1970년 2월 1일 CBS(기독교대구방송국) 기자로 입사, 이후 동아일보 포항지사로 이직, 1979년 1월 1일 부산지사로 발령. 부마항쟁 때 ‘유신철폐’라는 단어가 포함된 기사를 전국 최초로 게재. 1980년 봄 사적 모임에서 전두환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해직기자가 되었고, 7년 후 1987년 6월민주항쟁 이후 복직하여 2002년 정년퇴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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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최국태
최국태님 (시민)
구술자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마산으로 이주하였고, 창신고를 졸업했다. 1977년 경남대학교 병설 산업전문대학에 입학했지만 휴학하고 양계업에 종사하던 중 부마항쟁을 맞았다. 군 입대를 앞두고 친구들과의 송별회를 위해 시내에 나갔다가 데모대에 휩쓸렸고, 친구네 집으로 향하던 중 계엄군에 붙잡혀 북마산파출소에서 밤새도록 맞았다. 구술자는 입대 영장을 보여주고 다음날 석방되었는데, 그때의 억울함이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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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박한석
박한석님 (부산일보 기자)
구술자는 1991년까지 부산일보사에서 기자로 재직했다. 부마항쟁 때 마산지사에서 선배 김택용과 현장을 취재한 구술자는 다음 사항을 강조하였다. 남포파출소 화재, 경찰 측의 데모대 1차 저지선은 무학초등학교, 2차는 불종거리, 최루탄 가스를 흡입하여 고통스러웠던 기억, 데모대를 폭행하던 모습, 시위대의 주요 계층은 화이트칼라보다 블루칼라 층이었음, 김주열의 모교인 까닭에 마산상고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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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김성화
김성화님 (부산대학생)
구술자는 마산에서 태어났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1979년 부산대 어문계열로 입학했다. 부마항쟁 당시 10월 16일 부산대 도서관 앞 시위부터 참여했으며,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구정문을 통해 교외로 진출했다. 부산교육대학교 앞까지 진출했으나 구체적인 경로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교대앞에서 ‘탱크’를 보았고, 그 기억은 지금도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다. 16일 이후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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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이은희A
이은희님 (부산대학생)
구술자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남성여고 재학 시절 ‘문우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서클을 이끌었다. 1979년 부산대 어문계열에 입학, 같은 동기들이 조직한 ‘ᄒᆞᆫ’이라는 독서모임에서 활동하였다. 10월 16일 부산대 시위 후 사대부고를 통해 교외로 진출하여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16일 오후 광복동 시위에 참여했다. 17일에도 광복동 남포동 시위에 참여했으며,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을 맞아 작은 부상을 입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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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김영호
김영호님 (형사)
구술자는 부마민주항쟁 당시 동래경찰서 정보과 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부산대학교 담당 형사였고, 학생들의 동향을 살피는 업무를 하였다. 학내에서 시위가 일어났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이때 경찰의 진압이 실패했고, 결국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였다고 증언했다. 구술자는 이후에도 정보과 형사로 활동하였는데, 지금은 ‘왜 그때 학생들을 도와주지 못했는지' 후회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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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정천식
정천식님 (동아대학생)
구술자는 부마민주항쟁 당시 동아대학교 학내 시위를 경험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서클활동을 하며 지역사회의 활동가들과도 통하였다. 그는 1979년 10월 17일 동아대학교 학내 시위 당시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던 것을 기억하며, 이후 시내 시위가 일어나기 전에 남포동, 부평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시내 정황을 살폈다. 부마민주항쟁으로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으나, 구술자의 사회 인식과 활동은 광주로 이어져 피해를 입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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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강경수
강경수님 (경남매일신보 기자)
구술자는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남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산호동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취재하던 중 여공이 사복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제지하다 신분이 발각되기도 했다. 부마민주항쟁 이후 1980년 5월 사석에서 5·18과 관련된 발언을 하였고, 이러한 것들이 1980년 8월 불법 연행 및 구금 피해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회사에서 강제 해직되어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이후 복직까지 사회·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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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성태용
성태용님 (부산대학생)
구술자는 1960년 창녕군 석동마을의 창녕 성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부산동고등학교를 졸업한 구술자는 79년 부산대 문리대 어문계열에 입학한 후 동문서클 동녘, 언더서클 민족사연구회에서 활동하며 가야성당의 노동야학에도 관여하였다. 동녘 선배 이진걸을 도와 10월 15일 부산대 교내시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16일 상대 시위대에 합류한 후 17일까지 부마항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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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강용업
강용업님 (부산대학생)
10월 16일 수업 전 길가에 뿌려진 전단지를 통해 시위 소식을 접하였고, 도서관 앞으로 이동하여 학과 친구들과 함께 적극 참여하였다. 온천교와 사직운동장 근처에서 제지당한 후 그대로 귀가하였고, 17일과 18일에는 시내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동안 부산대 의대생들의 시위 참여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본 구술에 따르면 동기생 정원 140명이 대부분 참여하였으며, 사직동에서 다수 체포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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