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열기
부마 아카이브
부마일지
부마를 보다
부마를 말하다
부마를 읽다
항쟁이야기
부마민주항쟁이란?
구술 사료 콘텐츠
신문 사료 콘텐츠
정보·자료
이용안내
공지사항
학술자료
검색 레이어 열기
상세검색
홈
부마를 말하다
부마를 말하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던 항쟁 당시 시민들의 기억을 담았습니다.
부마를 말하다
전체
당시직업
구술자명
관련지역
제목
설명
추천 검색어
부산
|
마산
|
부산대
|
동아대
|
경남대
|
학생
|
시민
|
총
147건
의 게시물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기
구술자 김유원
김유원님 (부산대 학생)
1961년 부산 중구에서 태어난 구술자는 부산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산대 공대 기계공학계열에 입학하여 동문 서클 동녘에서 활동하였다. 동문 선배 이진걸의 부탁으로 1979년 10월 15일 선언문 배부에 참여했고, 16일 시위는 정문 옆 공대 강의동에서 강의를 듣다가 가담하게 되었다. 함께 강의를 듣던 공대 학생들과의 집단적 참여가 아니라 개인적 참여였고, 이후 시내 시위에서 동녘 친구들을 만나 함께 행동하였다.
자세히 보기
구술자 박봉수
박봉수님 (제빵사)
구술자는 부마민주항쟁 당시 마산 창동, 오동동 일대에서 제빵사로서 항쟁에 참여했다. 그는 저녁무렵까지 학생들과 함께 시위대열에 참여했고, 이때 친구 집에서 가져온 신호탄을 한 학생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며칠 후 신호탄은 마산경찰서장 최창림에 의해 ‘사제총기’가 되어 있었다. 그는 신호탄임을 주장하였으나 경찰의 위협적인 말에 지금까지 진실을 밝히지 못지 못한 채 살아왔다. 정광준의 기자회견 이후 사제총기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호탄임을 밝혔다.
자세히 보기
구술자 김일
김일님 (부산대 학생)
독립운동가인 조부와 교사 출신의 지식층이었던 부친 덕택에 구술자는 진보적 가풍에서 성장하였고,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에도 참가하였다. 1980년 5.17 확대 계엄 실시 이후 7월 경 부산대 앞에서 교내 진입 문제로 군인들과 가벼운 시비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3박 4일 간 삼일공사에 끌려가 구타와 함께 가혹한 취조를 당하였다. 보안대는 교내로 진입하려 한 이유를 물으며 부마항쟁 기간 시위 여부도 캐물었다.
자세히 보기
구술자 이상민
이상민님 (군인)
구술자는 인천 출생으로 70년대 긴급조치 사회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1978년 1월 군에 징집되었고 부산 051 탄약창으로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1979년 부마항쟁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당시 군인 신분이었지만,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판매하던 ‘태백서점’과 ‘서면서림’을 종종 방문하여 책을 사보곤 했다. 10.26 직후 부대 내에서 진압훈련을 받은 적도 있다.
자세히 보기
구술자 김호연
김호연님 (부산공업전문대 학생)
구술자는 9·17못골시위가 임박했을 때 시위 결행 소식을 들었다. 이에 조금이나마 사회 변화에 힘이 될 수 있다면 참여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위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는 시위 당일 오전 유인물을 챙겼으며 동기인 김미애에게 유인물을 주었다. 시위 때는 학생들을 독려하고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시위를 주도했던 선배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도 결국 남부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구류 이후 학교로부터 무기정학(후에 유기정학)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자세히 보기
구술자 김미애
김미애님 (부산공업전문대 학생)
구술자 김미애는 1979년 9월 17일 부산공전 학내 시위에 참여했다. 부산공전 전자과에 입학하여 인문‧사회과학 등 지적 자극이 부족함을 느꼈고 학보사에 탈락했지만 목요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지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유신정권과 시국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견지하던 목요세미나는 김맹규를 중심으로 한 9‧17못골시위를 계획하였다. 김미애도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느꼈고, 유인물 배포 및 학생 참여 독려를 맡았다.
자세히 보기
구술자 김광철
김광철님 (박사생)
제주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1972년 동아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했다. 부마항쟁 당시 17일 오전 동아대 교내 시위에 참여하여 학교 밑 동아서점까지 시위를 하다 귀교, 이날 오후에는 남포동 극장가에서 시위에 참여했다. 부영극장에서 시위를 시작하여 충무동로터리, 토성중학교, 부산대병원, 법원 도청 등을 지나 다시 부영극장으로 진행하고 밤 11시경 귀가했다. 18일 계엄령 이후 동아대 캠퍼스 안에 군대가 진주하면서 군용천막을 치고 학교를 감시했다.
자세히 보기
구술자 원성남
원성남님 (회사원)
김영삼의 정치 초년생 시절부터 측근이었던 부친(원용표)의 생애와 이를 지켜보며 격변기를 함께 겪은 구술자의 이야기다. 부마항쟁 당시 구술자는 비록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신민당 지지자로서 역사적 순간을 감격적으로 지켜보았다. 함께 술을 마셨던 지인이 남포파출소 방화 문제로 조사를 받은 후 부친에게 김영삼의 자금책으로 수배령이 내려졌다. 타지 사찰로 도피하였다가 12·12 사건 이전 김영삼의 요청으로 수배령이 해제되고 나서야 귀가하였다.
자세히 보기
구술자 김균식
김균식님 (대학생)
유신 체제가 극에 달한 1979년 늦여름, 대구 3개 대학이 연합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이 일로 지명 수배가 떨어져 피신할 곳을 모색하던 중 선배로부터 부산 중부교회 최성묵 목사를 소개 받아 부산으로 이동, 다시 울산으로 갔다. 울산과 부산을 왕래하던 중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자갈치 시장에서 시위 군중을 만나고 자연스럽게 시위대에 합세하여 구호를 외치며 남포동 극장가와 자갈치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해질 무렵 울산으로 복귀했다.
자세히 보기
구술자 이용관
이용관님 (부산대 학생)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대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시위에 참여한 그는 1979년 10월 16일 (구)도서관에서 ‘데모가 났다’는 말을 듣고 곧장 밖으로 나갔고, 시위대열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며 전율을 느꼈다. 그는 넉넉한 터, 구정문 앞, 온천사거리까지 시위행렬을 따르면서도 기자임을 자각하며 학내로 돌아와 상황을 살피고, 저녁에는 남포동 시위에 참여했다. 10월 17일에는 <<부대신문>> 구성원들이 모여 각자의 메모를 공유하기도 했다.
자세히 보기
구술자 김성수
김성수님 (음악다방 DJ)
1979년 10월 18일, 당시 창동에 위치한 송학다방이라는 음악다방에서 DJ를 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 나가보니 경남대 학생 몇몇이 시위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길로 DJ선배들과 함께 나가 그 학생들과 같이 스크럼을 짜고 대열의 선두에 서서 시위에 나섰다. 처음 진격의 목표지점은 공화당사가 있던 용마맨션. 어시장을 지나 오동동 다리에 다다르자 진압경찰차가 앞을 막아섰는데, 시위대와 함께 차를 밀어 다리 밑으로 떨어뜨렸다.
자세히 보기
구술자 김광호
김광호님 (계엄군 : 육군 대위)
구술자의 조부 김정태는 김해 진영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사건의 피해자이다. 그의 부친 김영욱은 조부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회운동가이다. 구술자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고통받는 부친을 지켜보며 장남으로서 생활고와 신분 보장을 위해 직업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과 삼청교육을 겪으며 심적 고통으로 결국 군복을 벗게 된다.
총
147건
의 게시물이 있습니다.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