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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를 말하다
부마를 말하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던 항쟁 당시 시민들의 기억을 담았습니다.
부마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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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이춘성님 (경찰)
79년 부마민주항쟁이 있던 해에 부산동부경찰서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부마항쟁 때 상부의 명령으로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는 업무를 맡았으며, 10월 18일에는 부하 4명과 함께 시위대 동향 파악, 주동자 검거 임무를 맡아 광복동에 나갔다고 한다. 그러던 중 계엄군에 의해 무차별적 폭행을 당하는 시민을 보고 계엄군에게 항의했다. 계엄군은 경찰임을 인지하고도 구술자와 그의 부하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여 부하 1명은 머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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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박건
박 건님 (동아대 미대생)
10월 16일 여느 때처럼 학교로 갔으나 휴강이었다. 빈 강의실 칠판에 쓰인 ‘4시에 부영극장 앞 집결’을 보고 혼자 부영극장으로 갔다. 남포동과 자갈치 사이 대로에서 시위를 시작하자마자 경찰 버스가 와서 시위대를 마구잡이로 버스에 밀어 넣었고, 구술자도 연행되어 중부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취조 과정에서 곤봉으로 등에 피가 나고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 고통을 나중에 <긁기>라는 부마항쟁 관련 작품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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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조갑제
조갑제님 (기자)
구술자는 1971년 2월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문화부와 사회부 소속으로 있으면서 중금속 오염 보도 등 여러 특종 보도를 하였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현장에서 시위대의 폭발적 에너지를 목격한 데 이어, 10·26사건이 발생하자 항쟁의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는 것을 깨닫고 그 기록을 남기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물이 1987년 6월 29일 출간된 <<유고>>(전 2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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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장동범
장동범님 (기자)
구술자는 부산대학교 4학년 때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 기간 기자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취재는 불가능했고 그 현장을 목격할 뿐이었다. 계엄령이 내려진 날 부산역에서 완전 군장한 군인들이 줄지어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저녁에는 광복동 입구에서 젊은 남자가 팬티차림으로 꿇어앉아 있고 그 앞에 군인이 위협적으로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 10.26사건 이후 보도 통제가 내려와 기사는 전부 군인들에게 검열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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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김유원
김유원님 (부산대 학생)
1961년 부산 중구에서 태어난 구술자는 부산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산대 공대 기계공학계열에 입학하여 동문 서클 동녘에서 활동하였다. 동문 선배 이진걸의 부탁으로 1979년 10월 15일 선언문 배부에 참여했고, 16일 시위는 정문 옆 공대 강의동에서 강의를 듣다가 가담하게 되었다. 함께 강의를 듣던 공대 학생들과의 집단적 참여가 아니라 개인적 참여였고, 이후 시내 시위에서 동녘 친구들을 만나 함께 행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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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박봉수
박봉수님 (제빵사)
구술자는 부마민주항쟁 당시 마산 창동, 오동동 일대에서 제빵사로서 항쟁에 참여했다. 그는 저녁무렵까지 학생들과 함께 시위대열에 참여했고, 이때 친구 집에서 가져온 신호탄을 한 학생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며칠 후 신호탄은 마산경찰서장 최창림에 의해 ‘사제총기’가 되어 있었다. 그는 신호탄임을 주장하였으나 경찰의 위협적인 말에 지금까지 진실을 밝히지 못지 못한 채 살아왔다. 정광준의 기자회견 이후 사제총기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호탄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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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김일
김 일님 (부산대 학생)
독립운동가인 조부와 교사 출신의 지식층이었던 부친 덕택에 구술자는 진보적 가풍에서 성장하였고,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에도 참가하였다. 1980년 5.17 확대 계엄 실시 이후 7월 경 부산대 앞에서 교내 진입 문제로 군인들과 가벼운 시비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3박 4일 간 삼일공사에 끌려가 구타와 함께 가혹한 취조를 당하였다. 보안대는 교내로 진입하려 한 이유를 물으며 부마항쟁 기간 시위 여부도 캐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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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이상민
이상민님 (군인)
구술자는 인천 출생으로 70년대 긴급조치 사회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1978년 1월 군에 징집되었고 부산 051 탄약창으로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1979년 부마항쟁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당시 군인 신분이었지만,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판매하던 ‘태백서점’과 ‘서면서림’을 종종 방문하여 책을 사보곤 했다. 10.26 직후 부대 내에서 진압훈련을 받은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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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김호연
김호연님 (부산공업전문대 학생)
구술자는 9·17못골시위가 임박했을 때 시위 결행 소식을 들었다. 이에 조금이나마 사회 변화에 힘이 될 수 있다면 참여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위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는 시위 당일 오전 유인물을 챙겼으며 동기인 김미애에게 유인물을 주었다. 시위 때는 학생들을 독려하고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시위를 주도했던 선배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도 결국 남부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구류 이후 학교로부터 무기정학(후에 유기정학)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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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김미애
김미애님 (부산공업전문대 학생)
구술자 김미애는 1979년 9월 17일 부산공전 학내 시위에 참여했다. 부산공전 전자과에 입학하여 인문‧사회과학 등 지적 자극이 부족함을 느꼈고 학보사에 탈락했지만 목요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지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유신정권과 시국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견지하던 목요세미나는 김맹규를 중심으로 한 9‧17못골시위를 계획하였다. 김미애도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느꼈고, 유인물 배포 및 학생 참여 독려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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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김광철
김광철님 (박사생)
제주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1972년 동아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했다. 부마항쟁 당시 17일 오전 동아대 교내 시위에 참여하여 학교 밑 동아서점까지 시위를 하다 귀교, 이날 오후에는 남포동 극장가에서 시위에 참여했다. 부영극장에서 시위를 시작하여 충무동로터리, 토성중학교, 부산대병원, 법원 도청 등을 지나 다시 부영극장으로 진행하고 밤 11시경 귀가했다. 18일 계엄령 이후 동아대 캠퍼스 안에 군대가 진주하면서 군용천막을 치고 학교를 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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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원성남
원성남님 (회사원)
김영삼의 정치 초년생 시절부터 측근이었던 부친(원용표)의 생애와 이를 지켜보며 격변기를 함께 겪은 구술자의 이야기다. 부마항쟁 당시 구술자는 비록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신민당 지지자로서 역사적 순간을 감격적으로 지켜보았다. 함께 술을 마셨던 지인이 남포파출소 방화 문제로 조사를 받은 후 부친에게 김영삼의 자금책으로 수배령이 내려졌다. 타지 사찰로 도피하였다가 12·12 사건 이전 김영삼의 요청으로 수배령이 해제되고 나서야 귀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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