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목명 |
배다지 |
이형명 |
|
생년월일 |
|
성별 |
남성 |
관련장소 |
부산시 기장군 |
항쟁지역 |
|
주기사항 |
|
항쟁당시신분 |
자영업 |
구술요약 |
부산 민주인사, 시민사회의 원로라 할 수 있는 구술자는 1934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월내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구술자는 큰고모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1948년 중학교 2학년 때 『사회주의 강화』라는 책을 선배의 권유로 읽은 후 친구 7명을 규합하여 8월 15일 유인물을 돌리려다 붙잡혀 한 달여 고문에 시달리다 29일 구류를 살게 된다. 동래고등학교 재학 시 임시수도 부산의 큰 정치행사에 구경을 가곤 하던 구술자는 1954년 부산대 정치학과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산수 이종률선생의 민족혁명론에 깊이 공감하고 대학 2학년 때부터 선생의 자택 수일원에서 생활하며 민주민족청년동지회 등 조직운동을 시작한다. 1955년 이종률 선생을 중심으로 민족문화협회가 창립되었고, 구술자 역시 이에 참여하였다. 1958년 국제신보사 기자가 되었으나, 4.19혁명이 벌어지고 민주민족혁명을 지향하기 위한 청년조직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이 서울로 옮겨가면서 민민청 부산경남맹부 간사장으로 활동한다. 이때 국제신보사를 퇴사하였다. 4.19혁명 후 1960년 구술자는 민민청을 중심으로 반공법 및 데모규제법 반대투쟁에 동참하고 남북학생회담 지지궐기대회, 2대악법 반대 학생궐기대회, 교원노조 합법화지지투쟁 등을 해나간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경남협의회 준비위원회에서 2대 악법 반대 공동투쟁위원회를 만들었을 때 민민청대표로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민자통 경남협의회에서 활동하며 경남노인회 지원활동, 동아대 학생사회문제연구회 지도를 했다. 마산일보 기자생활 중 그는 통혁당 인물로 연루되어 구속, 3년을 복역했다. 1986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 참여하고 범민련 활동을 하였으나, 노선 차이로 제명되었다. 그 후 민자통에서도 자진사퇴하였고 전국연합 내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에서 활동하였다. |
부마민주항쟁관련 |
유년과 청소년기 / 대학 입학, 수일원, 민족문화협회 / 민주민족혁명론과 민주민족청년동맹, 민자통 경남협의회/ 통혁당 사건, 부마항쟁 / 1990년대 민주민족운동 / 이후 삶과 의식 |
관련어 |
배다지, 이종률, 민주민족혁명론,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4.19혁명, 국제신보, 민주민족청년동지회, 민족문화협회,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국제신보사, 마산일보사,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통일혁명당(통혁당),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